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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충북 청주 현대사를 복원하기 위해 청주 기억여행을 떠납니다. 해방 직후부터 1960년 4·19 혁명 시기까지 청주에서 있었던 정치, 사회 사건을 살펴보고 지역 현대사를 재구성하고자 합니다. 이 작업은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근현대사 역사 텍스트를 만드는 길입니다. 또한 민주주의, 인권, 평화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길이기도 합니다. <기자말>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신형식을 상대할 사람은 홍 선생밖에 없소이다.""글쎄요. 나는 이미 불출마 선언을 했는데..."
초대 지방선거에서 충북 청주시 유력자인 김지준이 홍원길 바다신릴게임 에게 도의원 출마를 권유한 자리였다.
초대 지방선거와 홍원길의 등장
당시 청주시의원은 청주시를 5개의 선거구로 나누어, 각 선거구당 다득점자 순으로 4명씩 뽑아 총 20명을 선출했다. 충북도의원은 청주에서 다득점자 순으로 2명을 선출했다. 출마자들의 셈법은 복잡하게 작용했다. 도의원에 출마해도 무난할 이민우는 시의원으로 손오공릴게임예시 방향을 바꾸었고, 도의원에는 김지준이 나가도록 했다.
자유당에서는 이미 신형식과 최동선이 출사표를 던진 상태였다. 주변의 만류로 출마 의사를 접은 김지준은 홍원길에게 도의원 출마를 강권했다. 자유당 충북도당 부위원장 신형식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무소속 홍원길을 중심으로 모였다.
초대와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던 홍 골드몽릴게임릴게임 원길은 원래 지방의원에 출마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주변의 권유와 당시 선거법상 도의원에 당선돼도 사퇴하지 않고 1954년 실시될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자격이 부여된 점 때문에 출마를 결심했다. 즉, 국회의원에 뜻을 두고 있던 홍원길이 2년 동안 정치적 공백으로 있느니, 워밍업 차원으로 도의원에 출마한 셈이었다.
그는 '지방분권 릴게임다운로드 확립'과 '민본행정 구현'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중 지방자치라는 정치적 이슈가 큰 주목을 받기는 어려웠다.
사실 홍원길이 인기를 얻은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충주의 아나키스트 서상경의 지원 때문이었다. <동아일보> 기자이기도 했던 서상경은 청주에 와 '내가 본 홍원길'이라는 즉흥시를 지었다. 홍원길 선거운동 진영에서 야마토게임방법 는 개인 연설회 때마다 서상경의 시를 낭독했다. 그 시는 전쟁으로 고단했던 시민들의 심신을 위로하며, 깊은 감명을 주었다(홍원길, <청곡회고록>, 1978).
이러저러한 이유로 홍원길은 청주시에서 최다득점을 기록하며 1952년 5월 10일 실시된 초대 충북도의원에 무난히 당선되었다. 차점자는 일제강점기인 1937년에 충북도회의원을 역임한 최동선이었다. 청원군에서는 군수와 도청 과장을 역임한 한정구와 군수 출신 장응두, 반민특위 조사관 출신 전병수, 이장 출신 민병두가 당선되었다.
청주·청원에서 도의원에 당선된 6명 중 홍원길과 한정구만 무소속이었고, 나머지 4명은 자유당 소속이었다. 사실상 무소속도 친여세력과 다름없었다.
청주시의원에는 서병돈, 전명식, 이대원, 송재근, 서재조, 김용식, 이민우 등 20명이 당선되었다. 당선자들의 당적을 보면 자유당 11명, 민국당 1명, 한청(대한청년단) 2명, 무소속 6명으로, 여권 계열이 절대다수였다.
전쟁 속의 지방선거와 대통령의 정치적 전략
▲ 충북도의회 개원식 제1회 충북도의회 개원식. 1952년
ⓒ 충청북도의회
전쟁 중 지방선거를 치렀다는 이야기는 낯설기만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방선거'를 1991년에 처음 실시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처음 지방선거가 실시된 것은 휴전협정 이전인 1952년이었다.
경기도, 강원도, 서울특별시는 완전히 수복되지 않아 도의원 선거에서 제외되었다. 나머지 7개 도에서는 5월 10일 도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도의원 선거 이전인 4월 25일, 시·읍·면 의원 선거가 이미 치러졌다는 것이다. 군의원 선거는 없었지만, 행정의 가장 밑바닥인 읍·면 단위에서 의원을 뽑았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전란 중에 어떻게 지방선거를 치를 수 있었던 것일까?
사실 우리나라에서 지방자치법이 제정된 것은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1949년 7월 4일 지방자치법 제정에 따라 8월 15일부터 지방자치단체가 설치되었다. 하지만 지방의회는 성립되지 못했다. 이유는 이승만 정부가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을 이유로 지방선거를 연기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지방선거를 실시한 배경은 집권 연장 욕망이었다.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에 이승만은 위기의식을 가졌다. 무소속 의원이 국회의원 정원의 60%를 차지하며 대통령 재선 가능성이 위협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대통령은 국회의원이 선출하는 간접선거 방식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통령과 국회가 갈등하는 국면이 형성되었다. 이승만 정부가 제출한 직선제 개헌안은 1952년 1월 18일 국회에서 찬성 19표, 반대 143표, 기권 1표로 부결되었다. 직선제 개헌으로 재집권을 노렸던 이승만은 국회 통제의 한계를 절감하고, 원외 자유당을 내세워 개헌안 부결 반대 민중대회를 개최하고 국회의원 소환 운동까지 벌였다.
반면 민주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반이승만 세력은 1952년 4월 17일, 곽상훈 의원 외 122명의 연서로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했다. 이에 맞서 원외 자유당을 주축으로 한 18개 사회단체는 국회 개헌안 반대 전국 정당투쟁위원회를 조직했다(이승우, <도정반세기>, 1996).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4월과 5월, 지방의회 의원 선거가 전격적으로 실시되었다. 이승만은 지방선거를 통해 지역의 유력자들을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구축하려 했다. 다시 말해 지방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기 위해 실시된 것이 아니라 이승만의 집권 욕망을 위해 이용된 것이다.
초대 충북도의회 개원과 거수기 정치
▲ 청주시의회 개원식 1952년 제1회 청주시의회 개원식
ⓒ 청주시
1952년 5월 29일, 중앙초등학교 강당은 호떡집에 불난 격이었다. 초대 도의회 개원식이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중앙초등학교 강당이 충북도의회 건물로 이용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1951년 5월 26일 남부군이 청주시를 습격해 도청 건물 일부를 방화했기 때문이다.
도의회 개원준비를 위해 탁자, 의자, 발언대, 방청객용 의자 등이 긴급 제작되었다. 오찬을 위해 교실 두 개가 임시로 사용되었다. 학교 뒷마당에서는 큰 가마솥에 고깃국을 끓였다. 도의원들과 도청 간부, 기자, 관계자들에게 국밥 한 그릇씩을 대접하기 위해서였다.
개원식은 최고령자인 전병수(55) 의원의 의사봉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임시 의장으로 의장단 선출을 진행했다. 의장에는 청주 출신 최동선 의원이 당선되었다. 문제는 부의장 선거였다. 옥천 출신 권복인(자유당)과 청원 출신 한정구(무소속)가 2차 투표까지 동점을 기록한 것이다.
이럴 경우 의장이 고령자인 한정구 의원의 당선을 선포하면 되었지만, 결국 3차 투표까지 진행되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었다. 방청석에 있던 자유당 충북도당 부위원장 신형식의 정치적 모략이 개입된 것이다.
당시 신형식은 부위원장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위원장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는 무소속 의원들을 불러 "3차 투표를 실시해 권복인을 당선시키라"고 지시했다. 결국 규칙을 어기면서까지 자유당 소속 권복인을 부의장으로 당선시켰다.
의장단 선출이 끝난 후, 임시 의장 전병수는 단상에서 내려오는 대신 김경(제천)의원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이후 김경 의원은 '국회해산 결의안'을 제출했고, 투표 결과 재석 28명 중 찬성 23, 반대 0으로 결의안은 통과되었다.
개원식 하루 전날인 5월 28일, 자유당 충북도당 중집에서 국회해산권 결의안을 통과시키라는 지침을 받은 상태였다. 이 결의안은 도의원에게 국회해산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이승만의 정치공세를 뒷받침하는 거수기 역할에 그쳤다.
거수기 역할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부산 정치파동 때 또 하나의 코미디가 벌어졌다. 이승만은 재집권을 노리며 추진한 대통령직선제와 상·하양원제를 골격으로 한 개헌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장면 국무총리를 해임하고 장택상을 임명했다.
1952년 5월 25일,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와 전라남·북도 일부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데 이어 개헌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을 구속하는 등 국회 기능을 마비시켰다. 이런 와중에 이승만 정부는 지방의원을 동원해 '국회해산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국민회와 대한청년단 등 단체와 백골단·땃벌떼 등 각종 폭력조직을 동원해 관제 데모를 부추기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초대 충북도의회 제1회 회기가 6월 4일 끝나자, 충북 도의원들은 관내 읍·면의회 대표들을 데리고 6월 10일까지 부산에 모이라는 지시를 받았다. 김경 의원은 충북 대표로 선정되어 이승만 대통령을 면담했다.
면담 자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어서 물러들 가서 각자의 직책을 맡아 보시오"라고 말했다. 이에 김경을 비롯한 충북 대표단은 "이승만 대통령 각하 만세"라며 만세삼창을 외쳤다. 즉, 지방의원들은 고유의 업무와 역할을 수행하기보다는 대통령의 거수기 노릇을 한 셈이었다.
전국 최연소 의원과 풀뿌리 민주주의
▲ 최동찬 1950년대 자유당 충북도당 앞에선 최동찬
ⓒ 최동찬
1956년 8월 8일 실시된 제2대 시·읍·면 의원 선거에서 최동찬은 만 30세에 전국 최연소로 청주시의원에 당선되었다. 자유당 소속인 그는 특색 있는 선거운동을 했다.
그는 청주시 예산에 따른 세입·세출안을 근거로 합리적인 예산집행에 관한 구체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다른 후보들이 장황한 유세를 하는 동안, 최동찬은 단문 형태의 정책 중심 연설로 시민들의 호평을 받았다.
그는 당선 후 청주시 업무를 충분히 숙지한 뒤 시정 감사에 임했다. 당시 자유당 충북도당 위원장은 제3대 충북도지사를 역임한 이명구였다. 초대 지방선거 당시인 1952년에는 제2대 충북도지사를 지낸 이광이 충북도당 위원장을 맡았다. 자유당 충북도당은 1956년부터 당·정 협의회를 개최했다.
최동찬과 함께 제2대 청주시의원에 당선된 박학래 역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충남 청양 출신으로 양반가 후손이었지만, 조부가 동학농민전쟁에 연루돼 집안이 풍비박산 나면서 5세에 부모를 따라 청주로 이사했다.
▲ 박학래 1950년대 후반 청주시의원 시절의 박학래
ⓒ 박학래
15세에 소년 가장이 된 그는 참외 장수, 아이스크림 장수, 목욕탕 종업원, 화성관·북일여관 보이 등을 전전했다(국사편찬위원회, <우익단체 간부를 통해 본 1940~50년대 청주지역 정치·사회상>, 2009).
1954년 석교동 동회장 보궐선거에 출마한 박학래는 한 표 차이로 당선되었다. 그는 동회장 재임 시절, 명절 때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떡쌀과 명태 두 코씩을 나누어 주었고, 전주에 가로등 설치, 하수구 정비 사업 등도 진행했다.
1956년 석교동 반장들은 감옥에 갈 각오로 당사자 몰래 도장을 찍어 박학래를 청주시의원에 입후보시켰다. 그는 그해 시의원 선거에서 전국 최대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1950년대 지방선거가 이승만 대통령의 거수기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풀뿌리 민주주의' 도입이라는 긍정적 측면도 있었다.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신형식을 상대할 사람은 홍 선생밖에 없소이다.""글쎄요. 나는 이미 불출마 선언을 했는데..."
초대 지방선거에서 충북 청주시 유력자인 김지준이 홍원길 바다신릴게임 에게 도의원 출마를 권유한 자리였다.
초대 지방선거와 홍원길의 등장
당시 청주시의원은 청주시를 5개의 선거구로 나누어, 각 선거구당 다득점자 순으로 4명씩 뽑아 총 20명을 선출했다. 충북도의원은 청주에서 다득점자 순으로 2명을 선출했다. 출마자들의 셈법은 복잡하게 작용했다. 도의원에 출마해도 무난할 이민우는 시의원으로 손오공릴게임예시 방향을 바꾸었고, 도의원에는 김지준이 나가도록 했다.
자유당에서는 이미 신형식과 최동선이 출사표를 던진 상태였다. 주변의 만류로 출마 의사를 접은 김지준은 홍원길에게 도의원 출마를 강권했다. 자유당 충북도당 부위원장 신형식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무소속 홍원길을 중심으로 모였다.
초대와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던 홍 골드몽릴게임릴게임 원길은 원래 지방의원에 출마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주변의 권유와 당시 선거법상 도의원에 당선돼도 사퇴하지 않고 1954년 실시될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자격이 부여된 점 때문에 출마를 결심했다. 즉, 국회의원에 뜻을 두고 있던 홍원길이 2년 동안 정치적 공백으로 있느니, 워밍업 차원으로 도의원에 출마한 셈이었다.
그는 '지방분권 릴게임다운로드 확립'과 '민본행정 구현'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중 지방자치라는 정치적 이슈가 큰 주목을 받기는 어려웠다.
사실 홍원길이 인기를 얻은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충주의 아나키스트 서상경의 지원 때문이었다. <동아일보> 기자이기도 했던 서상경은 청주에 와 '내가 본 홍원길'이라는 즉흥시를 지었다. 홍원길 선거운동 진영에서 야마토게임방법 는 개인 연설회 때마다 서상경의 시를 낭독했다. 그 시는 전쟁으로 고단했던 시민들의 심신을 위로하며, 깊은 감명을 주었다(홍원길, <청곡회고록>, 1978).
이러저러한 이유로 홍원길은 청주시에서 최다득점을 기록하며 1952년 5월 10일 실시된 초대 충북도의원에 무난히 당선되었다. 차점자는 일제강점기인 1937년에 충북도회의원을 역임한 최동선이었다. 청원군에서는 군수와 도청 과장을 역임한 한정구와 군수 출신 장응두, 반민특위 조사관 출신 전병수, 이장 출신 민병두가 당선되었다.
청주·청원에서 도의원에 당선된 6명 중 홍원길과 한정구만 무소속이었고, 나머지 4명은 자유당 소속이었다. 사실상 무소속도 친여세력과 다름없었다.
청주시의원에는 서병돈, 전명식, 이대원, 송재근, 서재조, 김용식, 이민우 등 20명이 당선되었다. 당선자들의 당적을 보면 자유당 11명, 민국당 1명, 한청(대한청년단) 2명, 무소속 6명으로, 여권 계열이 절대다수였다.
전쟁 속의 지방선거와 대통령의 정치적 전략
▲ 충북도의회 개원식 제1회 충북도의회 개원식. 1952년
ⓒ 충청북도의회
전쟁 중 지방선거를 치렀다는 이야기는 낯설기만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방선거'를 1991년에 처음 실시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처음 지방선거가 실시된 것은 휴전협정 이전인 1952년이었다.
경기도, 강원도, 서울특별시는 완전히 수복되지 않아 도의원 선거에서 제외되었다. 나머지 7개 도에서는 5월 10일 도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도의원 선거 이전인 4월 25일, 시·읍·면 의원 선거가 이미 치러졌다는 것이다. 군의원 선거는 없었지만, 행정의 가장 밑바닥인 읍·면 단위에서 의원을 뽑았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전란 중에 어떻게 지방선거를 치를 수 있었던 것일까?
사실 우리나라에서 지방자치법이 제정된 것은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1949년 7월 4일 지방자치법 제정에 따라 8월 15일부터 지방자치단체가 설치되었다. 하지만 지방의회는 성립되지 못했다. 이유는 이승만 정부가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을 이유로 지방선거를 연기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지방선거를 실시한 배경은 집권 연장 욕망이었다.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에 이승만은 위기의식을 가졌다. 무소속 의원이 국회의원 정원의 60%를 차지하며 대통령 재선 가능성이 위협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대통령은 국회의원이 선출하는 간접선거 방식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통령과 국회가 갈등하는 국면이 형성되었다. 이승만 정부가 제출한 직선제 개헌안은 1952년 1월 18일 국회에서 찬성 19표, 반대 143표, 기권 1표로 부결되었다. 직선제 개헌으로 재집권을 노렸던 이승만은 국회 통제의 한계를 절감하고, 원외 자유당을 내세워 개헌안 부결 반대 민중대회를 개최하고 국회의원 소환 운동까지 벌였다.
반면 민주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반이승만 세력은 1952년 4월 17일, 곽상훈 의원 외 122명의 연서로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했다. 이에 맞서 원외 자유당을 주축으로 한 18개 사회단체는 국회 개헌안 반대 전국 정당투쟁위원회를 조직했다(이승우, <도정반세기>, 1996).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4월과 5월, 지방의회 의원 선거가 전격적으로 실시되었다. 이승만은 지방선거를 통해 지역의 유력자들을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구축하려 했다. 다시 말해 지방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기 위해 실시된 것이 아니라 이승만의 집권 욕망을 위해 이용된 것이다.
초대 충북도의회 개원과 거수기 정치
▲ 청주시의회 개원식 1952년 제1회 청주시의회 개원식
ⓒ 청주시
1952년 5월 29일, 중앙초등학교 강당은 호떡집에 불난 격이었다. 초대 도의회 개원식이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중앙초등학교 강당이 충북도의회 건물로 이용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1951년 5월 26일 남부군이 청주시를 습격해 도청 건물 일부를 방화했기 때문이다.
도의회 개원준비를 위해 탁자, 의자, 발언대, 방청객용 의자 등이 긴급 제작되었다. 오찬을 위해 교실 두 개가 임시로 사용되었다. 학교 뒷마당에서는 큰 가마솥에 고깃국을 끓였다. 도의원들과 도청 간부, 기자, 관계자들에게 국밥 한 그릇씩을 대접하기 위해서였다.
개원식은 최고령자인 전병수(55) 의원의 의사봉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임시 의장으로 의장단 선출을 진행했다. 의장에는 청주 출신 최동선 의원이 당선되었다. 문제는 부의장 선거였다. 옥천 출신 권복인(자유당)과 청원 출신 한정구(무소속)가 2차 투표까지 동점을 기록한 것이다.
이럴 경우 의장이 고령자인 한정구 의원의 당선을 선포하면 되었지만, 결국 3차 투표까지 진행되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었다. 방청석에 있던 자유당 충북도당 부위원장 신형식의 정치적 모략이 개입된 것이다.
당시 신형식은 부위원장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위원장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는 무소속 의원들을 불러 "3차 투표를 실시해 권복인을 당선시키라"고 지시했다. 결국 규칙을 어기면서까지 자유당 소속 권복인을 부의장으로 당선시켰다.
의장단 선출이 끝난 후, 임시 의장 전병수는 단상에서 내려오는 대신 김경(제천)의원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이후 김경 의원은 '국회해산 결의안'을 제출했고, 투표 결과 재석 28명 중 찬성 23, 반대 0으로 결의안은 통과되었다.
개원식 하루 전날인 5월 28일, 자유당 충북도당 중집에서 국회해산권 결의안을 통과시키라는 지침을 받은 상태였다. 이 결의안은 도의원에게 국회해산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이승만의 정치공세를 뒷받침하는 거수기 역할에 그쳤다.
거수기 역할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부산 정치파동 때 또 하나의 코미디가 벌어졌다. 이승만은 재집권을 노리며 추진한 대통령직선제와 상·하양원제를 골격으로 한 개헌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장면 국무총리를 해임하고 장택상을 임명했다.
1952년 5월 25일,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와 전라남·북도 일부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데 이어 개헌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을 구속하는 등 국회 기능을 마비시켰다. 이런 와중에 이승만 정부는 지방의원을 동원해 '국회해산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국민회와 대한청년단 등 단체와 백골단·땃벌떼 등 각종 폭력조직을 동원해 관제 데모를 부추기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초대 충북도의회 제1회 회기가 6월 4일 끝나자, 충북 도의원들은 관내 읍·면의회 대표들을 데리고 6월 10일까지 부산에 모이라는 지시를 받았다. 김경 의원은 충북 대표로 선정되어 이승만 대통령을 면담했다.
면담 자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어서 물러들 가서 각자의 직책을 맡아 보시오"라고 말했다. 이에 김경을 비롯한 충북 대표단은 "이승만 대통령 각하 만세"라며 만세삼창을 외쳤다. 즉, 지방의원들은 고유의 업무와 역할을 수행하기보다는 대통령의 거수기 노릇을 한 셈이었다.
전국 최연소 의원과 풀뿌리 민주주의
▲ 최동찬 1950년대 자유당 충북도당 앞에선 최동찬
ⓒ 최동찬
1956년 8월 8일 실시된 제2대 시·읍·면 의원 선거에서 최동찬은 만 30세에 전국 최연소로 청주시의원에 당선되었다. 자유당 소속인 그는 특색 있는 선거운동을 했다.
그는 청주시 예산에 따른 세입·세출안을 근거로 합리적인 예산집행에 관한 구체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다른 후보들이 장황한 유세를 하는 동안, 최동찬은 단문 형태의 정책 중심 연설로 시민들의 호평을 받았다.
그는 당선 후 청주시 업무를 충분히 숙지한 뒤 시정 감사에 임했다. 당시 자유당 충북도당 위원장은 제3대 충북도지사를 역임한 이명구였다. 초대 지방선거 당시인 1952년에는 제2대 충북도지사를 지낸 이광이 충북도당 위원장을 맡았다. 자유당 충북도당은 1956년부터 당·정 협의회를 개최했다.
최동찬과 함께 제2대 청주시의원에 당선된 박학래 역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충남 청양 출신으로 양반가 후손이었지만, 조부가 동학농민전쟁에 연루돼 집안이 풍비박산 나면서 5세에 부모를 따라 청주로 이사했다.
▲ 박학래 1950년대 후반 청주시의원 시절의 박학래
ⓒ 박학래
15세에 소년 가장이 된 그는 참외 장수, 아이스크림 장수, 목욕탕 종업원, 화성관·북일여관 보이 등을 전전했다(국사편찬위원회, <우익단체 간부를 통해 본 1940~50년대 청주지역 정치·사회상>, 2009).
1954년 석교동 동회장 보궐선거에 출마한 박학래는 한 표 차이로 당선되었다. 그는 동회장 재임 시절, 명절 때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떡쌀과 명태 두 코씩을 나누어 주었고, 전주에 가로등 설치, 하수구 정비 사업 등도 진행했다.
1956년 석교동 반장들은 감옥에 갈 각오로 당사자 몰래 도장을 찍어 박학래를 청주시의원에 입후보시켰다. 그는 그해 시의원 선거에서 전국 최대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1950년대 지방선거가 이승만 대통령의 거수기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풀뿌리 민주주의' 도입이라는 긍정적 측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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