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아그라, 바캉스보다 뜨거운 우리 사랑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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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25-12-08 12:20 조회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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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그라, 바캉스보다
뜨거운 우리 사랑을 위해
1. 바캉스, 그리고 뜨거운 사랑의 재발견
여름이면 바캉스를 떠나 새로운 경험과 휴식을 찾고, 일상의 피로를 잠시 잊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캉스는 떠나기 전의 설렘과 돌아올 때의 행복감을 남겨주지만, 그 속에서 진정한 의미의 휴식은 무엇일까요? 바로 연인 혹은 부부 사이에서 더욱 깊어지는 사랑과 활력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바캉스가 특별해도, 관계에 있어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뜨겁고 활기찬 사랑을 유지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비아그라와 함께라면 바캉스보다 더 뜨겁고, 더 깊은 사랑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2. 사랑에 대한 고민, 당신만의 해답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성적인 변화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많은 남성들이 성욕 감소나 발기력 약화, 그리고 자신감 저하에 고민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육체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서적, 정신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에 대해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적 건강은 나이와 관계없이 누구나 챙겨야 할 중요한 부분입니다. 성적인 활력은 단지 남성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부부나 연인 간의 관계를 유지하고 더욱 깊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3. 비아그라의 역할활력과 자신감을 되찾다
비아그라는 남성의 성적 건강을 지키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발기부전의 치료제라는 한정적인 이미지를 넘어서, 비아그라는 남성의 전반적인 성적 활력을 되살리고, 자신감을 높여주는 중요한 약물입니다.
비아그라는 PDE5 억제제로 작용하여, 혈관을 이완시키고 혈액의 흐름을 원활하게 만들어 성기의 발기를 돕습니다. 이 약물은 약 30분에서 1시간 이내에 효과를 발휘하며, 그 효과는 평균적으로 4시간 정도 지속됩니다. 또한, 체내에 쌓인 불필요한 피로감을 줄여주어 관계에 대한 자신감을 되찾게 해줍니다.
4. 왜 비아그라가 중요한가?
비아그라는 단순한 약물이 아닙니다. 이 약물이 중요한 이유는, 성적인 활력을 잃은 많은 남성들이 이를 통해 자신감을 회복하고, 다시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뜨거운 감정을 되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비아그라는 몸의 상태를 빠르게 회복시켜, 연인 혹은 부부와의 관계에서 훨씬 더 깊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돕습니다.
신뢰 회복
성적인 불만족이나 갈등은 많은 커플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결국 관계에 금이 가게 만들 수 있습니다. 비아그라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관계에서의 신뢰를 다시 쌓을 수 있도록 돕습니다.
정서적 안정
성적 자신감을 회복하면서, 정서적 안정도 함께 찾아옵니다. 성적 문제가 사라지면 그만큼 심리적인 스트레스도 줄어들고, 자연스럽게 파트너와의 관계가 건강하고 행복한 방향으로 발전합니다.
적극적인 사랑
비아그라는 성적 자신감을 회복시켜, 사랑을 더욱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는 부부 사이 뿐만 아니라 연인 사이에도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서로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더욱 깊이 느낄 수 있게 됩니다.
5. 비아그라, 올바르게 사용하는 법
비아그라는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정확하게 복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약물의 효과를 제대로 누리기 위해서는 몇 가지 기본적인 규칙을 따르는 것이 필수입니다.
복용 시간
비아그라는 성관계 예정 시간 최소 30분에서 1시간 전에 복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복용 후에는 약 4시간 동안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복용 방법
비아그라는 물과 함께 복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가벼운 식사 후에도 복용이 가능하지만, 과식 후에는 흡수 속도가 늦어질 수 있습니다.
복용 주의사항
하루 한 번만 복용할 수 있으며, 24시간 이내에 두 번 이상 복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또한, 고혈압, 심혈관 질환 등의 기저질환이 있는 경우, 복용 전 전문가의 상담이 필요합니다.
6. 바캉스와 비아그라더 뜨겁고, 더 즐겁게
바캉스는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험을 쌓고, 사랑을 다시 한 번 되살릴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하지만 뜨겁고 활기찬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여행지나 환경의 변화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성적인 활력과 자신감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관계의 품격을 높이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비아그라는 그런 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바캉스와 함께 비아그라를 사용하면, 뜨거운 태양보다 더 뜨거운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됩니다.
7. 연인에게 보여주는 사랑의 진정성
비아그라는 단순히 발기부전 치료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감을 되찾고, 사랑을 더욱 뜨겁게 만드는 하나의 도구입니다. 이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어보세요.
비아그라와 함께라면, 바캉스보다 더 뜨겁고, 더 멋진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의 사랑을 다시 불붙이고, 더 깊은 관계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시작이 될 것입니다.
8. 결론비아그라, 사랑을 재발견하는 방법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식는 것만큼 아쉬운 일도 없습니다. 비아그라는 사랑을 되살리고, 관계를 더욱 깊고 의미 있게 만드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바캉스보다 뜨겁고, 그 어떤 경험보다 강렬한 사랑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비아그라와 함께라면, 사랑을 다시 불태울 수 있습니다. 이제 그 뜨거운 순간을 경험해보세요.
비아그라는 남성들의 자신감을 높여주는 중요한 제품이지만, 구매 시 신중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처방전 필요없는 비아그라를 찾고 있지만, 정품 여부를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일부 온라인 판매처에서는 가짜 제품이 유통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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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admin@slotnara.info
[이돈삼 기자]
▲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 떨어진 순천 문화의거리. 순천부읍성 서문안내소 앞이다.
ⓒ 이돈삼
순천시 금곡동은 순천 원도심의 서쪽에 자리하 야마토연타 고 있다. 매곡동과 중앙동, 남내동과 접해있다. 청수골은 상사면과 경계를 이룬다. 난봉산에서 흐르는 물이 맑다고 청수(淸水)마을로 불렸다. 일제강점 때 금곡동(金谷洞)으로 바뀌었다.
순천부읍성 서문이 여기에 있었다. 순천부읍성은 순천의 옛 행정 중심지이면서 방어 거점이었다. 1430년 쌓은 둘레 1025미터, 높이 3. 바다이야기pc버전다운 6미터의 석성이었다. 동서남북에 성문을 뒀다. 밖으로 드러낸 적대(敵臺)와 성 위에 낮게 쌓은 여장(女墻), 해자도 설치됐다. 성안에 아사(衙舍), 객사, 내아, 형청, 양사재(養士齋), 군기고, 진휼창, 옥사 등 지방행정 주요 시설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도 순천부읍성을 찾았다. 백의종군하던 1597년 4월과 수군 재 바다이야기무료 건에 나선 8월이었다. 이순신은 읍성에서 크고 작은 활과 화살, 화약, 무기를 손에 넣었다.
▲ 야마토게임 금곡동 담장 벽화. 도시재생 사업이 추진되면서 그려졌다.
ⓒ 이돈삼
야마토릴게임
▲ 김영철 열사의 숨결이 밴 금곡동 풍경. 순천의 원도심으로 도시재생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 이돈삼
읍성은 일제강점기 도시 개발과 성곽 철폐로 사라졌다. 남문 연자루는 1925년에 없어졌다. 성문이 있던 자리에 표지석이 세워져 있어 읍성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순천향교와 용강서원도 금곡동에 있다.
금곡동은 격동기 순천역사의 주무대였다. 진보 지식인의 항일무대였다. 매산등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개신교 전도의 터전이었다. 근대교육과 의료의 시작지점이었다. 광복 직후엔 10·19여수순천 사건의 격전지였다.
금곡동은 여느 원도심처럼 도로가 좁다. 몇 년 전부터 도시재생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마을기업을 통해 공동체에 활력을 불어넣고, 담장에 벽화도 그려졌다. 한적한 골목을 따라 솔방솔방 걷는 재미가 쏠쏠한 이유다.
지난 11월 29일 오후, 단출한 행사가 이 마을에서 있었다. 순천부읍성 서문안내소 옆 서문터정원에서다. '5·18 민주열사 김영철 생가 알림식'이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을 지킨 김영철 열사 생가에 표지판을 달고, 알리는 자리다. 열사의 배우자(김순자)와 자녀(김동명, 김연우)도 참석했다.
▲ 김영철 열사의 부인 김순자 여사와 아들 김동명, 딸 김연우 씨. 11월 29일 순천 금곡동에서 열린 ‘5.18 민주열사 김영철 생가 알림식’에서다.
ⓒ 이돈삼
▲ 김영철 열사의 묘.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 있다.
ⓒ 이돈삼
김영철(1948∼1998) 열사는 광주YWCA와 광천동시민아파트를 거점으로 주민운동을 했다. 5·18민주화운동 때 항쟁지도부 기획실장으로 활동하고, 5월 27일 새벽 계엄군에 붙잡혔다. 상무대 헌병대에서 당한 갖은 폭력과 고문 후유증으로 18년 동안 환상과 현실 세계를 덧없이 헤맸다. 지금은 국립5·18민주묘지에 잠들어 있다.
"순천은 김영철 열사의 숨결이 밴 곳입니다. 금곡동에서 태어났고, 순천중앙교회에서 신협 지도자 교육을 받았습니다. 세광교회는 사랑하는 여인과 혼례를 올린 곳이고, 별량면사무소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했습니다. 별량면 무선마을이 처갓집, 별량마산교회는 청년회장으로 활동하며 주민운동을 한 곳입니다."
김 열사 생가 터 찾기에 앞장선 박병섭 (가칭)'김영철 열사를 기리는 순천시민모임' 대표의 말이다. 역사교사로 퇴직한 박 대표는 지역사를 연구하며 청소년 체험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 김영철 열사 생가 터로 연결되는 금곡동 마을 풍경. 순천부읍성 서문터정원에서 가깝다.
ⓒ 이돈삼
▲ 김영철 열사의 생가 터. 순천시 금곡동(서문성터길74)에 있다.
ⓒ 이돈삼
김 열사는 1948년 순천군 순천읍 금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와 함께 '목포모자원'을 거쳐 1955년 광주 인성모자원(영신원)으로 옮겨갔다. 광주 서석초등학교와 광주서중·광주일고를 졸업했다. 가정형편 탓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공무원 시험을 봤다. 1968년 10월 승주군 별량면사무소 발령을 받았다. 면사무소 숙직실에서 생활하며 생활비를 아꼈다.
'설익은 아침을 치우고 수덕 쪽으로 추경(秋耕) 지도 출장을 갔다. 청내에 처박혀 있는 것보단 출장가는 게 자유분방스러워 자주 나가고 싶다. 지리도 익히고. 군(郡)에서 경찰과 함께 양곡 불하 때문에 문책하러 온 모양. 똑같은 도둑놈들인데...'
면사무소 근무 50여 일 지난 12월 11일 수요일 일기다. 김영철 열사 유고 모음 <못 다 이룬 공동체의 꿈>에 실려 있다.
▲ 광천동시민아파트에서 열린 청년회 주말학교 활동 모습. 1977년 모습이다.
ⓒ 김영철열사 가족
▲ 들불야학에서 레크리에이션을 지도하고 있는 김영철 강학. 1979년 모습이다.
ⓒ 김영철열사 가족
공직사회 비리에 절망한 그는 공무원을 그만두고 군대에 갔다. 제대하고 서울에서 신문 배달, 과일 행상, 포장마차 등을 경험했다. 1976년 순천중앙교회에서 열린 신용협동조합 지도자 강습회에 참여했다. 그동안 가까이 지내던 김순자와 혼례를 올린 것도 그때다. 농사와 막일을 하며 교회 청년회 활동을 했다. 이듬해 전남협동개발단 간사로 임명돼 광주 영신영아원으로 옮겨갔다.
1977년 10월 광천동시민아파트에 살며 주민운동과 빈민운동을 했다. 새마을지도자로도 선출됐다. 이듬해 광주YWCA신협 이사장 추천으로 참사(상무) 근무를 시작했다. 고아 박용준과 의형제를 맺고 함께 생활했다. 들불야학 특별강학으로 참여해 회의 진행과 토론법, 레크리에이션 등을 맡았다.
5·18 민주화운동 기간엔 여러 유인물과 '투사회보' 제작에 참여했다. 도심에서 계엄군을 물리친 '해방광주' 기간엔 분수대 연단에 올라 연설도 했다. 시민학생투쟁위원회 기획실장을 맡아 최후까지 도청을 지켰다.
▲ 옛 상무대 헌병대 영창. 옛 헌병대가 자리한 광주 5.18자유공원에 복원돼 있다.
ⓒ 이돈삼
▲ 옛 상무대 헌병대에 급조된 군사법정. 광주 5.18자유공원에 복원돼 있다.
ⓒ 이돈삼
죽지 못하고 살아남아 끌려간 그는 상무대 헌병대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다. 항쟁을 '간첩의 사주받은 폭동'으로 몰아가는 데에 맞서 콘크리트 벽에 머리를 부딪쳐 자진을 시도했다. 고문에 굴복하면, 광주에 붉은색이 덧칠될 게 불 보듯 뻔했다. 항쟁에 오점을 남기지 않으려는 그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신군부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군사재판을 통해 1심 10년, 2심에서 7년 형을 선고했다. 81년 성탄절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김영철은 병원 치료와 장기 입원을 되풀이했다. 고문과 자살 시도 후유증이었다. 공간이 헌병대 철창에서 감옥으로, 다시 정신병원 철장으로 옮겨진 것이다.
육신의 기력이 다한 김영철은 1998년 8월 16일 애처로운 생을 마감했다. 18년 동안 계속된 그의 '오월투쟁'도 마침표를 찍었다. 문병란 시인의 표현처럼 '무너진 도시를 안고 18년을 앓아온 사나이', 김영철 열사의 헌신과 열정의 태 자리가 순천 금곡동이다.
▲ 들불 7열사 기념비. 광주 5.18자유공원에 세워져 있다.
ⓒ 이돈삼
덧붙이는 글
▲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 떨어진 순천 문화의거리. 순천부읍성 서문안내소 앞이다.
ⓒ 이돈삼
순천시 금곡동은 순천 원도심의 서쪽에 자리하 야마토연타 고 있다. 매곡동과 중앙동, 남내동과 접해있다. 청수골은 상사면과 경계를 이룬다. 난봉산에서 흐르는 물이 맑다고 청수(淸水)마을로 불렸다. 일제강점 때 금곡동(金谷洞)으로 바뀌었다.
순천부읍성 서문이 여기에 있었다. 순천부읍성은 순천의 옛 행정 중심지이면서 방어 거점이었다. 1430년 쌓은 둘레 1025미터, 높이 3. 바다이야기pc버전다운 6미터의 석성이었다. 동서남북에 성문을 뒀다. 밖으로 드러낸 적대(敵臺)와 성 위에 낮게 쌓은 여장(女墻), 해자도 설치됐다. 성안에 아사(衙舍), 객사, 내아, 형청, 양사재(養士齋), 군기고, 진휼창, 옥사 등 지방행정 주요 시설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도 순천부읍성을 찾았다. 백의종군하던 1597년 4월과 수군 재 바다이야기무료 건에 나선 8월이었다. 이순신은 읍성에서 크고 작은 활과 화살, 화약, 무기를 손에 넣었다.
▲ 야마토게임 금곡동 담장 벽화. 도시재생 사업이 추진되면서 그려졌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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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철 열사의 숨결이 밴 금곡동 풍경. 순천의 원도심으로 도시재생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 이돈삼
읍성은 일제강점기 도시 개발과 성곽 철폐로 사라졌다. 남문 연자루는 1925년에 없어졌다. 성문이 있던 자리에 표지석이 세워져 있어 읍성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순천향교와 용강서원도 금곡동에 있다.
금곡동은 격동기 순천역사의 주무대였다. 진보 지식인의 항일무대였다. 매산등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개신교 전도의 터전이었다. 근대교육과 의료의 시작지점이었다. 광복 직후엔 10·19여수순천 사건의 격전지였다.
금곡동은 여느 원도심처럼 도로가 좁다. 몇 년 전부터 도시재생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마을기업을 통해 공동체에 활력을 불어넣고, 담장에 벽화도 그려졌다. 한적한 골목을 따라 솔방솔방 걷는 재미가 쏠쏠한 이유다.
지난 11월 29일 오후, 단출한 행사가 이 마을에서 있었다. 순천부읍성 서문안내소 옆 서문터정원에서다. '5·18 민주열사 김영철 생가 알림식'이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을 지킨 김영철 열사 생가에 표지판을 달고, 알리는 자리다. 열사의 배우자(김순자)와 자녀(김동명, 김연우)도 참석했다.
▲ 김영철 열사의 부인 김순자 여사와 아들 김동명, 딸 김연우 씨. 11월 29일 순천 금곡동에서 열린 ‘5.18 민주열사 김영철 생가 알림식’에서다.
ⓒ 이돈삼
▲ 김영철 열사의 묘.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 있다.
ⓒ 이돈삼
김영철(1948∼1998) 열사는 광주YWCA와 광천동시민아파트를 거점으로 주민운동을 했다. 5·18민주화운동 때 항쟁지도부 기획실장으로 활동하고, 5월 27일 새벽 계엄군에 붙잡혔다. 상무대 헌병대에서 당한 갖은 폭력과 고문 후유증으로 18년 동안 환상과 현실 세계를 덧없이 헤맸다. 지금은 국립5·18민주묘지에 잠들어 있다.
"순천은 김영철 열사의 숨결이 밴 곳입니다. 금곡동에서 태어났고, 순천중앙교회에서 신협 지도자 교육을 받았습니다. 세광교회는 사랑하는 여인과 혼례를 올린 곳이고, 별량면사무소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했습니다. 별량면 무선마을이 처갓집, 별량마산교회는 청년회장으로 활동하며 주민운동을 한 곳입니다."
김 열사 생가 터 찾기에 앞장선 박병섭 (가칭)'김영철 열사를 기리는 순천시민모임' 대표의 말이다. 역사교사로 퇴직한 박 대표는 지역사를 연구하며 청소년 체험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 김영철 열사 생가 터로 연결되는 금곡동 마을 풍경. 순천부읍성 서문터정원에서 가깝다.
ⓒ 이돈삼
▲ 김영철 열사의 생가 터. 순천시 금곡동(서문성터길74)에 있다.
ⓒ 이돈삼
김 열사는 1948년 순천군 순천읍 금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와 함께 '목포모자원'을 거쳐 1955년 광주 인성모자원(영신원)으로 옮겨갔다. 광주 서석초등학교와 광주서중·광주일고를 졸업했다. 가정형편 탓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공무원 시험을 봤다. 1968년 10월 승주군 별량면사무소 발령을 받았다. 면사무소 숙직실에서 생활하며 생활비를 아꼈다.
'설익은 아침을 치우고 수덕 쪽으로 추경(秋耕) 지도 출장을 갔다. 청내에 처박혀 있는 것보단 출장가는 게 자유분방스러워 자주 나가고 싶다. 지리도 익히고. 군(郡)에서 경찰과 함께 양곡 불하 때문에 문책하러 온 모양. 똑같은 도둑놈들인데...'
면사무소 근무 50여 일 지난 12월 11일 수요일 일기다. 김영철 열사 유고 모음 <못 다 이룬 공동체의 꿈>에 실려 있다.
▲ 광천동시민아파트에서 열린 청년회 주말학교 활동 모습. 1977년 모습이다.
ⓒ 김영철열사 가족
▲ 들불야학에서 레크리에이션을 지도하고 있는 김영철 강학. 1979년 모습이다.
ⓒ 김영철열사 가족
공직사회 비리에 절망한 그는 공무원을 그만두고 군대에 갔다. 제대하고 서울에서 신문 배달, 과일 행상, 포장마차 등을 경험했다. 1976년 순천중앙교회에서 열린 신용협동조합 지도자 강습회에 참여했다. 그동안 가까이 지내던 김순자와 혼례를 올린 것도 그때다. 농사와 막일을 하며 교회 청년회 활동을 했다. 이듬해 전남협동개발단 간사로 임명돼 광주 영신영아원으로 옮겨갔다.
1977년 10월 광천동시민아파트에 살며 주민운동과 빈민운동을 했다. 새마을지도자로도 선출됐다. 이듬해 광주YWCA신협 이사장 추천으로 참사(상무) 근무를 시작했다. 고아 박용준과 의형제를 맺고 함께 생활했다. 들불야학 특별강학으로 참여해 회의 진행과 토론법, 레크리에이션 등을 맡았다.
5·18 민주화운동 기간엔 여러 유인물과 '투사회보' 제작에 참여했다. 도심에서 계엄군을 물리친 '해방광주' 기간엔 분수대 연단에 올라 연설도 했다. 시민학생투쟁위원회 기획실장을 맡아 최후까지 도청을 지켰다.
▲ 옛 상무대 헌병대 영창. 옛 헌병대가 자리한 광주 5.18자유공원에 복원돼 있다.
ⓒ 이돈삼
▲ 옛 상무대 헌병대에 급조된 군사법정. 광주 5.18자유공원에 복원돼 있다.
ⓒ 이돈삼
죽지 못하고 살아남아 끌려간 그는 상무대 헌병대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다. 항쟁을 '간첩의 사주받은 폭동'으로 몰아가는 데에 맞서 콘크리트 벽에 머리를 부딪쳐 자진을 시도했다. 고문에 굴복하면, 광주에 붉은색이 덧칠될 게 불 보듯 뻔했다. 항쟁에 오점을 남기지 않으려는 그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신군부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군사재판을 통해 1심 10년, 2심에서 7년 형을 선고했다. 81년 성탄절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김영철은 병원 치료와 장기 입원을 되풀이했다. 고문과 자살 시도 후유증이었다. 공간이 헌병대 철창에서 감옥으로, 다시 정신병원 철장으로 옮겨진 것이다.
육신의 기력이 다한 김영철은 1998년 8월 16일 애처로운 생을 마감했다. 18년 동안 계속된 그의 '오월투쟁'도 마침표를 찍었다. 문병란 시인의 표현처럼 '무너진 도시를 안고 18년을 앓아온 사나이', 김영철 열사의 헌신과 열정의 태 자리가 순천 금곡동이다.
▲ 들불 7열사 기념비. 광주 5.18자유공원에 세워져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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