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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진가는 멋진 관광지에만 있지 않다. 중산간부터 바닷가까지 긴 세월에 걸쳐 주민들이 뿌리 내리며 살고 있는 곳, 바로 마을에서 더욱 멋진 제주를 만날 수 있다. 2025년부터 심규호 중국학회회장이 신발 끈을 질끈 묶고 제주 마을로 향한다. 심규호 회장이 들려주는 흥미로운 마을 이야기를 [제주의소리]를 통해 만나보자. [편집자 주]
하운암 포제청에서 바라본 상가리 전경.
더럭 마을
더럭 마을, 지금의 상, 하가리를 일컫는 야마토게임하기 옛 지명이다. 이외에도 가락加樂이라고 쓴 적도 있다.
고려시대에는 현촌제縣村制를 실시하여 1300년(충렬왕 26년) 제주에 동서도현東西道縣을 설치하여 전체 15개의 현촌을 두었다. 지금의 상가, 하가리는 당시 고내현에 속했다. 조선조는 초기 고려의 행정체제를 그대로 답습하다가 태종 16년(1416년) 제주에 제주목 외에 정의현과 대정현 바다이야기모바일 을 설치하면서 일부 큰 마을을 나누었다. 1418년 고내현이 가락촌과 고내촌으로 나뉜 것은 이 때문이다. 1448년 세종 30년에 신숙청辛俶晴 목사 때부터 마을을 상가락촌上加樂村(웃더럭), 하가락촌下加樂村(알더럭)으로 구분하여 불렀다고 하는데, 지금처럼 상가리, 하가리로 부르게 된 것은 정조 22년(1798년)이니 지금으로부터 220여 년 전의 일이다.
릴박스 『상가리지上加里誌』에 따르면 돌이 많은 땅을 제주어로 '드럭' 또는 '더럭'이라고 하는데, 마을에 그런 땅이 적지 않아 그럴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제주어 사전에 '드르(벌판)'나 '드러(자꾸, 쉬지 않고)는 있으되 '드럭'이나 '더럭'은 보이지 않으니 유감이다. 혹시 '가락加樂'이란 명칭이 앞서고 더럭은 나중에 생긴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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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설에 따르면 양씨 입촌조이자 설촌 인물인 제주 양씨 성주공파 11세 양기梁琪와 그의 아들 양유침梁有琛(탐라 성주 양호梁浩의 후손)이 고려 충렬왕 2년(1276) 지금의 제주시 이도동 가락촌嘉樂川 동쪽에 있는 가령촌嘉嶺村(가령골)에서 이주했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가락'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시기적으로 더 황금성릴게임사이트 럭보다 가락이 앞설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연유에 대한 설명이 조금 궁색하다. "지금 더럭으로 부르게 된 것은 '더할 가'자의 '더'와 즐거울 '락樂'자를 합하여 '더락'으로 부르다가 음운의 변천과정에서 '더럭'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상, 하가리 설촌 유래에 나오는 내용인데, 상가리 마을회관의 설촌 유래에 따르면 '더럭'이 '가락'에 앞선다. 어떤 것이 정확한지 헷갈린다.
상가리 마을회관 옆 비석.
말은 글에 앞선다. 말과 글이 반드시 합치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을 이름은 구어와 문어, 말과 글이 반드시 같을 수 없다. 제주 마을 이름 또한 처음에는 마을사람들끼리 쓰는 제주 말이었다가 시대적 상황에 따라 한자 이름으로 바뀌면서 달라졌다. 한자의 음만 빌리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상가리나 하가리, 그 이전 이름인 가락加樂은 모두 한자어로 된 마을 이름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이름이 없었나? 생각건대 지금도 여전히 쓰이는 더럭이 원래 이름일 수 있다.
굳이 마을 이름의 내력을 살펴본 것은 이름이 지닌 상징성 때문이다. 상, 하가리가 분리된 것은 이미 5백여 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마을은 아래위로 수백 년을 함께 살았다. 그들에게는 '더럭'이라는 공동의 호칭이 있다. 그 내력은 정확치 않으나 '더럭'에 아름다운 색칠을 하는 것은 지금도 가능하다, 아니 지금부터 시작이다.
더럭 초등학교
혹시 우리는 '더럭'이란 제주어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어떤 뜻인지 정확치 않은 까닭이다. 하지만 그 말은 여전히 남아 있다. 더럭 초등학교.
현대 교육기관으로 하가 국민학교가 설립된 것은 1946년이다. 4.3의 광풍으로 1949년 학교 건물이 전소되었으나 그 이듬해 판자로 벽을 두른 기와집 두 채를 마련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1954년 옛 지명을 살려 더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첫 해 57명이던 학생 숫자는 점점 불어나 1979년 358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1980년부터 아동수가 감소하면서 결국 1996년 1831명을 끝으로 더럭 국민학교는 사라지고, 애월 국민학교 더럭분교로 격하되었다. 1999년 졸업생은 1명, 2009년에는 전교생이 17명뿐이었다.
지금 더럭 초등학교는 제주도민은 물론이고 외지인들도 한 번 가보고 싶어 하는 학교로 거듭났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 갑자기 학령인구가 늘어난 것도 아닌데, 분교에서 벗어나 더럭 초등학교의 이름을 되찾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맹자·공손추하公孫丑下』에서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내린 좋은 시기는 땅의 이로움만 못하고, 땅의 이로움은 사람들의 화합만 못하다.
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
이는 사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인화'를 강조하기 위한 말이다. 허나 무언가를 이루고자 할 때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말이기도 하다. 어떤 일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시기가 맞아야 하고, 토대나 여건이 준비되어야 하며, 사람의 노력이 가세해야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노력이다. 더럭 초등학교의 부활은 이를 가장 명료하게 보여준다.
더럭 초등학교 교사와 마을 사람들의 학교를 살리기 위한 의기투합(특히 이완국 교사와 장봉길 이장, 임대주택 신축하여 다자녀 가정 입주를 돕고 이완국 교사는 국악 포함 음악교육 등을 통한 심성교육), 삼성전자 갤럭시SⅡ 시판에 따른 고화질(HD) '슈퍼 아몰레드 컬러 프로젝트'와 색채디자이너 장 필립 랑클로(Jean Phiilippe Lenclos)의 협력(학교 건물 무지개 색으로 단장), 그리고 교가에 나오는 것처럼 "우뚝 솟은 한라산 정기를 받아, 고내봉 푸른 기슭 감싸이는 곳", "저 멀리 푸른 바다 감돌아들고, 연화못 맑은 물이 샘솟는 곳"에 자리한 더럭 초등학교가 무지개 색깔로 더욱 아름답게 빛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천시와 지리, 그리고 인화가 잘 어울린 셈이다.
하여 학교를 방문한 이들은 "색감이 아름다운 학교", "곳곳에 숨어 있는 따뜻한 감성",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장소", "동심을 자아내는 곳", "바람소리에 실린 제주 특유의 평온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거듭 찬사를 보냈다.
필자가 생각하는 '더럭'은 이런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이를 더럭 정신이라 칭하면 어떨까? 마을사람들끼리 서로 화합하고, 힘을 합쳐 자신의 터전을 아름답게 하는 것. '더럭' 초등학교가 잘 보여주고 있다.
천년 퐁낭
하가리가 연꽃 마을이라면 상가리는 퐁낭 마을이다. 하가는 연화지蓮花池가 있어 연화마을이고, 상가는 천년 팽나무에 퐁낭거리가 있어 퐁낭 마을이다. 그런데 어찌된 연유인지 연화지에 연꽃이 보이지 않는다. 또한 팽나무가 즐비하여 퐁낭거리라 칭해지던 곳은 아는 이가 별로 없는지라 한적하기만 하다.
하가리 연화지.
상가리에 천년 퐁낭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 가보고 싶었다. 마을 안길을 따라 걷다 보니 제법 나이가 든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노거수老巨樹' 오래된 큰 나무라는 뜻일 터이다. 옆에 세워진 팻말을 보니 수령 100년이라고 적혀 있다. 이 나무인가? 다시 마을회관으로 돌아가서 가서 되물었다. 아니라고 한다. 다시 찾아갔다. 과연 있었다. 보기에도 수백 년의 인고를 겪어온 듯한 오래된 팽나무다.
상가리 천년 퐁낭.
팽나무의 학명은 Celtis sinensis, 한어로는 박수樸樹라고 한다. 《시경·대아大雅·역박棫朴》에 보면 "무성한 역박, 땔감으로 베어다가 화톳불 삼네(芃芃棫樸,薪之槱之)."라는 구절이 나온다. 혹자는 '역박'을 두릅나무 또는 떡갈나무로 번역하지만 어색하다. 역박은 박수樸樹, 즉 팽나무 또는 팽나무랑 유사한 푸조나무인 듯하다. 이렇듯 팽나무는 매우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게 익숙한 나무이다.
팽나무를 제주에서는 퐁낭 또는 폭낭이라고 한다. 제주 마을에는 유별나게 수령이 꽤 되는 퐁낭이 있는 곳이 많다. 물론 느티나무(굴무기낭), 동백나무, 후박나무, 삼나무, 감귤나무, 구실잣밤나무, 소나무, 벚꽃나무, 가시나무 등 마을마다 다양한 나무들이 자생하지만, 그 중에서도 퐁낭과 굴무기낭은 예로부터 당산나무나 정자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퐁낭은 당신이 계신 신목으로 대접받기도 한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몇몇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략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커다란 나무가 그늘을 이루어 여름이면 여러 사람들이 밖에 나와 쉬는 곳, 즉 낭뜰에 쉼팡이 되면서 마을사람들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대소사를 논의하는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마을의 광장 노릇을 한 셈이다. 이른바 정자목亭子木이란 말에서 알 수 있다시피 폭낭은 마을 사람들의 애환을 들어주는 나무였던 것이다.
둘째, 폭낭은 해풍에 강하고, 바람에 잔가지가 꺾여도 나무가 고사하지 않고 잘 자란다. 천년 퐁낭도 1959년 사라호 태풍 때 나무 위쪽이 부러졌지만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셋째, 어린잎은 봄에 따서 날 것으로 먹을 수 있고, 열매인 '팽' 또한 먹거나 기름을 짜는 데 사용한다. 게다가 목재가 가볍고 단단하여 잘 갈라지지 않기 때문에 건축재나 가구를 만들 때 사용할 수 있다. 그만큼 사람의 생활과 가까이 있다는 뜻이다.
넷째, 나무가 잘 자라 25m까지 자란다고 할 정도로 비교적 큰 나무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을 어디에서든 잘 보인다. 일종의 랜드마크인 셈이다.
상가리의 상징은 퐁낭이다. 그렇다면 퐁낭을 만나기 위해 상가리에 가야 하지 않을까? 연화지를 보러 하가리에 가는 것처럼. 퐁낭거리를 걷다보면 제주의 토종귤 가운데 하나인 진귤도 만날 수 있다.
심규호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 졸업, 동대학원 중문학 박사. 제주국제대 교수, 중국학연구회, 중국문학이론학회 회장 역임. 현 제주중국학회 회장, 별꼴학교 이사장.
저서로 '육조삼가 창작론 연구', '도표와 사진으로 보는 중국사', '한자로 세상읽기', '부운재'(수필집) 등이 있으며, 역서로 '중국사상사', '중국문학비평소사', '마오쩌둥 평전', '덩샤오핑과 그의 시대', '개구리', '중국사강요', '완적집', '낙타샹즈' 등 70여 권이 있다.
하운암 포제청에서 바라본 상가리 전경.
더럭 마을
더럭 마을, 지금의 상, 하가리를 일컫는 야마토게임하기 옛 지명이다. 이외에도 가락加樂이라고 쓴 적도 있다.
고려시대에는 현촌제縣村制를 실시하여 1300년(충렬왕 26년) 제주에 동서도현東西道縣을 설치하여 전체 15개의 현촌을 두었다. 지금의 상가, 하가리는 당시 고내현에 속했다. 조선조는 초기 고려의 행정체제를 그대로 답습하다가 태종 16년(1416년) 제주에 제주목 외에 정의현과 대정현 바다이야기모바일 을 설치하면서 일부 큰 마을을 나누었다. 1418년 고내현이 가락촌과 고내촌으로 나뉜 것은 이 때문이다. 1448년 세종 30년에 신숙청辛俶晴 목사 때부터 마을을 상가락촌上加樂村(웃더럭), 하가락촌下加樂村(알더럭)으로 구분하여 불렀다고 하는데, 지금처럼 상가리, 하가리로 부르게 된 것은 정조 22년(1798년)이니 지금으로부터 220여 년 전의 일이다.
릴박스 『상가리지上加里誌』에 따르면 돌이 많은 땅을 제주어로 '드럭' 또는 '더럭'이라고 하는데, 마을에 그런 땅이 적지 않아 그럴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제주어 사전에 '드르(벌판)'나 '드러(자꾸, 쉬지 않고)는 있으되 '드럭'이나 '더럭'은 보이지 않으니 유감이다. 혹시 '가락加樂'이란 명칭이 앞서고 더럭은 나중에 생긴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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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설에 따르면 양씨 입촌조이자 설촌 인물인 제주 양씨 성주공파 11세 양기梁琪와 그의 아들 양유침梁有琛(탐라 성주 양호梁浩의 후손)이 고려 충렬왕 2년(1276) 지금의 제주시 이도동 가락촌嘉樂川 동쪽에 있는 가령촌嘉嶺村(가령골)에서 이주했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가락'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시기적으로 더 황금성릴게임사이트 럭보다 가락이 앞설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연유에 대한 설명이 조금 궁색하다. "지금 더럭으로 부르게 된 것은 '더할 가'자의 '더'와 즐거울 '락樂'자를 합하여 '더락'으로 부르다가 음운의 변천과정에서 '더럭'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상, 하가리 설촌 유래에 나오는 내용인데, 상가리 마을회관의 설촌 유래에 따르면 '더럭'이 '가락'에 앞선다. 어떤 것이 정확한지 헷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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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우리는 '더럭'이란 제주어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어떤 뜻인지 정확치 않은 까닭이다. 하지만 그 말은 여전히 남아 있다. 더럭 초등학교.
현대 교육기관으로 하가 국민학교가 설립된 것은 1946년이다. 4.3의 광풍으로 1949년 학교 건물이 전소되었으나 그 이듬해 판자로 벽을 두른 기와집 두 채를 마련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1954년 옛 지명을 살려 더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첫 해 57명이던 학생 숫자는 점점 불어나 1979년 358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1980년부터 아동수가 감소하면서 결국 1996년 1831명을 끝으로 더럭 국민학교는 사라지고, 애월 국민학교 더럭분교로 격하되었다. 1999년 졸업생은 1명, 2009년에는 전교생이 17명뿐이었다.
지금 더럭 초등학교는 제주도민은 물론이고 외지인들도 한 번 가보고 싶어 하는 학교로 거듭났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 갑자기 학령인구가 늘어난 것도 아닌데, 분교에서 벗어나 더럭 초등학교의 이름을 되찾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맹자·공손추하公孫丑下』에서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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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학교를 방문한 이들은 "색감이 아름다운 학교", "곳곳에 숨어 있는 따뜻한 감성",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장소", "동심을 자아내는 곳", "바람소리에 실린 제주 특유의 평온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거듭 찬사를 보냈다.
필자가 생각하는 '더럭'은 이런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이를 더럭 정신이라 칭하면 어떨까? 마을사람들끼리 서로 화합하고, 힘을 합쳐 자신의 터전을 아름답게 하는 것. '더럭' 초등학교가 잘 보여주고 있다.
천년 퐁낭
하가리가 연꽃 마을이라면 상가리는 퐁낭 마을이다. 하가는 연화지蓮花池가 있어 연화마을이고, 상가는 천년 팽나무에 퐁낭거리가 있어 퐁낭 마을이다. 그런데 어찌된 연유인지 연화지에 연꽃이 보이지 않는다. 또한 팽나무가 즐비하여 퐁낭거리라 칭해지던 곳은 아는 이가 별로 없는지라 한적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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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가리에 천년 퐁낭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 가보고 싶었다. 마을 안길을 따라 걷다 보니 제법 나이가 든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노거수老巨樹' 오래된 큰 나무라는 뜻일 터이다. 옆에 세워진 팻말을 보니 수령 100년이라고 적혀 있다. 이 나무인가? 다시 마을회관으로 돌아가서 가서 되물었다. 아니라고 한다. 다시 찾아갔다. 과연 있었다. 보기에도 수백 년의 인고를 겪어온 듯한 오래된 팽나무다.
상가리 천년 퐁낭.
팽나무의 학명은 Celtis sinensis, 한어로는 박수樸樹라고 한다. 《시경·대아大雅·역박棫朴》에 보면 "무성한 역박, 땔감으로 베어다가 화톳불 삼네(芃芃棫樸,薪之槱之)."라는 구절이 나온다. 혹자는 '역박'을 두릅나무 또는 떡갈나무로 번역하지만 어색하다. 역박은 박수樸樹, 즉 팽나무 또는 팽나무랑 유사한 푸조나무인 듯하다. 이렇듯 팽나무는 매우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게 익숙한 나무이다.
팽나무를 제주에서는 퐁낭 또는 폭낭이라고 한다. 제주 마을에는 유별나게 수령이 꽤 되는 퐁낭이 있는 곳이 많다. 물론 느티나무(굴무기낭), 동백나무, 후박나무, 삼나무, 감귤나무, 구실잣밤나무, 소나무, 벚꽃나무, 가시나무 등 마을마다 다양한 나무들이 자생하지만, 그 중에서도 퐁낭과 굴무기낭은 예로부터 당산나무나 정자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퐁낭은 당신이 계신 신목으로 대접받기도 한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몇몇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략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커다란 나무가 그늘을 이루어 여름이면 여러 사람들이 밖에 나와 쉬는 곳, 즉 낭뜰에 쉼팡이 되면서 마을사람들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대소사를 논의하는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마을의 광장 노릇을 한 셈이다. 이른바 정자목亭子木이란 말에서 알 수 있다시피 폭낭은 마을 사람들의 애환을 들어주는 나무였던 것이다.
둘째, 폭낭은 해풍에 강하고, 바람에 잔가지가 꺾여도 나무가 고사하지 않고 잘 자란다. 천년 퐁낭도 1959년 사라호 태풍 때 나무 위쪽이 부러졌지만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셋째, 어린잎은 봄에 따서 날 것으로 먹을 수 있고, 열매인 '팽' 또한 먹거나 기름을 짜는 데 사용한다. 게다가 목재가 가볍고 단단하여 잘 갈라지지 않기 때문에 건축재나 가구를 만들 때 사용할 수 있다. 그만큼 사람의 생활과 가까이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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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가리의 상징은 퐁낭이다. 그렇다면 퐁낭을 만나기 위해 상가리에 가야 하지 않을까? 연화지를 보러 하가리에 가는 것처럼. 퐁낭거리를 걷다보면 제주의 토종귤 가운데 하나인 진귤도 만날 수 있다.
심규호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 졸업, 동대학원 중문학 박사. 제주국제대 교수, 중국학연구회, 중국문학이론학회 회장 역임. 현 제주중국학회 회장, 별꼴학교 이사장.
저서로 '육조삼가 창작론 연구', '도표와 사진으로 보는 중국사', '한자로 세상읽기', '부운재'(수필집) 등이 있으며, 역서로 '중국사상사', '중국문학비평소사', '마오쩌둥 평전', '덩샤오핑과 그의 시대', '개구리', '중국사강요', '완적집', '낙타샹즈' 등 7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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